나를돌아보기,

친정엄마,

미친자유 2011. 7. 11.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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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뒤로 두 장을 넘기니

5월 8일 어버이날이 있다.

 

올해는 일요일이었다.

어버이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한 것은

새벽 1시가 넘어 시작한 <친정엄마>를 시청하며 끄억끄억 운 것이 전부이다.

 

사진 속에 친정엄마가 있다.

옛날 상을 펴놓고

양은냄비에 끓인 된장찌개와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 틀니로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김치를 씹는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내가 입지 않는 밤색과 검정이 섞인 체크무늬 남방을 즐겨 입었다.

그리고 큰 거울이 달린 낮은 화장대,

자개로 된 화장대 위에 화장품을 놓고 곱게 화장을 했다.

 

친정엄마의 자개사랑은 남달랐다.

30여년전에 1백만원짜리 자개장을 서울에서 사들여 왔고,

나는 그 모양을 보면서, 엄마가 무개념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자장면 먹는 것도 아까와했으며

라면도 비싸다면서, 라면 하나 끓일때 절반은 소면을 넣었던 짠순이였고,

 

자라는 아이들 겨울옷은 작아지면 풀어서 다시 짤 수 있는

털옷을 직접 짜 입힌 엄마였다.

왜 그렇게 궁상맞게 살아야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엄마는 자개장을 마련한 다음해에 100평의 땅을 구매하여,

아버지의 평면도를 기반으로 한 집을 짓고야 말았다.

그리고 엄마는 춤선생님을 집으로 초빙하여

아버지와 함께 사교댄스를 배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시집오며 받은 집 한 채를 늘려

새로운 집을 꾸미고, 그 집에 자개장을 놓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소망이었지 싶다.

 

새로운 집이 건축될 시점에 아버지가 선고를 받고 쓰러지시는 바람에,

아버지 월급의 절반 이상이 병원비와 약값으로 나가기 시작한터라,

그 궁상맞은 엄마공식은 볓들 날이 없었다.

새로 지은 집에서 아버지와 전축을 틀어놓고 블루스를 추는 것을 소망했던

엄마의 꿈은 아버지 병수발하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요즘에는 집을 사네, 집을 짓네 할 때, 은행 융자를 얻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 당시에 엄마는 땅사고 팔기 한 번 하지 않고, 집을 사고 팔아 이득을 챙기지 않고

오로시 공무원 월급을 모은 돈으로 그것을 해 낸 엄마였다.

 

 

 

 

 

내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된 후에는

주말에 집에 내려갔다 월요일 첫 차를 타기위해

택시를 탈 때,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민망할 정도로

택시 뒤에서 번호판을 확인하여

메모를 해 놓는 엄마였다.

시외전화비 많이 나온다며 내가 한 전화를 빨리 끊으라던 엄마였고,

직딩 1년차에 마련한 내 차 운전이 못미더워

조카가 초대한 미국여행을 포기했던 엄마였다.

 

 

 

 

 

 

 

영화 속 친정엄마와 달리

아들사랑이 남달라, 아들에게는 권총을 비롯한 장난감들을 사주면서도

내게는 인형 하나 사 준 적이 없는 엄마였다.

 

하지만, 내가 5학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후

엄마는 내게 노오란 구두와 십자매 한 쌍을 사주었다.

 

그리고 대학졸업때 내가 받았던 가장 큰 돈을 정장을 사입으라고 주었다.

그것이 고마워 나는 엄마의 뜻대로 나는 싫었지만, 핑크빛 투피스를 입었다.

 

 

 

 

 

 

 

친정엄마는 우리 반 엄마들중 나이많은 것으로 첫째 아니면 둘째였다.

나는 나이 많은 엄마가 학교오는 것이 싫었다.

국민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담임선생님 댁을 찾았다.

담배 한보루를 들고 말이다.

 

나는 그 날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와이로였다.

2학년이 되면서 내가 증명해 보였지만

코찔찔 1학년 아이들.. 차이가 나야 얼마나 난다고

내가 안스러워 담임 선생님께 담배 한보루의 와이로를 했단 말인가?

 

엄마가 보기엔 내가 부족한 녀석이 아닌데, 와이로를 하지 않아

상장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2학년이 된 후 다른 엄마들의 와이로를

내가 무찔러버렸고,

이후 엄마는 더 이상의 와이로를 하지 않아도 됐었다.

2학년 소풍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학교를 찾지 않아도 됐었다.

 

 

 

 

 

 

엄마와의 여행은

몇해전 클럽 ES와 여름여행중 아버지 흔적을 따라 황둔과 정선을

다녀 온 것이 전부이다.

 

엄마 역시 나를 데리고 한 여행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용인자연농원으로의 나들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엄마 친목회 가족모임으로 관광버스를 타고

현재의 에버랜드에서 청룡열차를 탔던 기억이다.

 

엄마는 청룡열차의 후유증으로 허리를 앓았다.

그 당시 엄마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다.

 

 

 

 

 

내가 아이를 낳으니, 엄마는 울었다.

밤새 젖을 먹이고 남은 젖을 짜내느라

잠을 자지 못하는 나에게

삼시 세끼 미역국을 끓여준 엄마였다.

 

아이를 목욕시킬 기운도 없는 엄마인지라

내가 아이 목욕도 시키며 산후조리를 했지만,

나를 힘들게하는 손자녀석이 밉다면서도

너무 이뻐서 머리가 아플지경이라고 말했던

친정엄마.

 

**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고향을 찾은 지숙은

친구에게 친정엄마를 부탁한다.

 

 

 

친정엄마의 눈물

 

 

 

그리고 지숙은 세상을 떴다.

 

 

 

 

동네 사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에

지숙이 부탁해 넣은 글자가 보인다.

엄마, 사랑해

 

 

 

나는 안다.

그리움이 쌓여 응어리가 생겼을지라도

내가 아플지 염려하고 있을 것임을.

그러니 엄마,

엄마도 아프지 마.

 

다음 생이 있다면, 엄마 딸로 태어날게.

 

 

 

2011/05/08

 

-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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